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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녹색걷기 2012. 7. 21. 08:43

 

1. 공리주의는 정당한가?

망망대해 구명보트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일 나이 어리고 병든 사람(A)을 희생시켜도 되나?

제러미 밴덤의 공리주의는 도덕의 최고 원칙이 행복의 극대화이며

옳은 행위는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A를 죽여서 얻은 이익이 희생보다 커야하며

이익이 크다면 희생시켜도 좋다는 결론이 된다.

공리주의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들고 있다.

또한 인간행위의 가치를 수치화하고 획일적으로 적용한다.

그래서 개인의 권리는 무시되고 질적인 차이는 고려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은 불행해도 그 외의 다수가 그 사람의 희생으로 행복하면 된다는 논리다.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가 인간에게 영원한 이익을 주어

장기적 사회의 발전을 유도하는데 필요하다고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공리는 개성을 존중하고 자유를 옹호할 수 있다고 한다.

삶의 기초와 근원이 쾌락추구라면 밀은 그 중에서도

고급 쾌락만이 공리에 도움이 된다고 단서를 둔다.

그러나 개인의 권리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만 존중된다면

사회 발전이라는 불확실한 상황에 따라 개인의 권리가 좌지우지 될 수 있다.

 

2. 자유지상주의는 공평한가?

마이클 조던의 엄청난 수입에 세금을 부과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이 맞나?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자는 국가가 개인의 신체와 목숨에 간섭하고,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법으로 강제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과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는 강압행위로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과 같아 개인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본다.

조던의 성공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라는

반박에도 그들은 이미 대가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조던이 행운아라서 행운을 나눠야 한다는 말에도

조던의 재능은 자신의 소유니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고 한다.

신체도 자신의 소유이므로 자유롭게 콩팥을 팔 수 있어야 한다면

그 콩팥이 하찮게 이용되어도 자유롭게 거래되어야 하며

마지막 남은 콩팥 하나도 개인이 팔겠다면 팔고나서 죽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목숨도 자신의 소유이므로 안락사가 허용돼야 하며,

합의된 식인 행위도 내가 그 사람에게 먹히고자 했으므로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대부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자신의 소유라고 해도 자유롭게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배에는 봉건적 방법, 기회균등을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 방식,

공정한 기회 균등을 주장하는 능력위주 방식, 차등의 원칙을 적용하는 평등주의 방식이 있다.

존 롤스는 자유지상주의에서의 분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지는 임의적 요소에 의해 좌우되며,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

결정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롤스의 차등원칙은 타고난 재능을 공동의 자산으로 여기고

공유하자는 가언합의인 호혜의 동의를 포함한다.

재능이 전적으로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특정 시기에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사회의 가치도 임의적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미덕과 도덕적 자격에 포상을 하는 것은 불공평한 것이다.

 

3. 자유시장은 공정한가?

군인을 모집할 때 강제징집, 고용, 자원병제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징집은 법이 강제하는 것이기에 불공평하지만

징집을 피해 대리복무자를 고용하는 것은 차별이라 할 수 있다.

자원병제는 원하는 사람만 선택하는 것이므로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강제되었다면 이 또한 불공평하며,

군복무를 시민의 의무라 여기는 미덕과 공동선을 침해한다.

사회의 의무가 시장의 물건이 된다면 책임감과 미덕은 땅에 떨어진다.

대가를 받고 대리 임신해주는 경우는 공정한가?

자유지상주의와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대리출산을 지지한다.

합의가 정당했는지와 생명을 돈으로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찬성하기 힘들다.

임신과 아기를 비하하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가치는 존중받아야 하는 대상이지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다. 공리를 평가할 때는 단순한 이익의 차원을 넘는

더 높은 기준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칸트는 인간을 존중하려면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인간이 존중받는 것은 자율적이며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율적 행동은 우리를 도구로 삼는다. 의무에 의한 동기는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올바른 행동이지만 끌림 동기는 쾌락이 주가 되기 쉽다.

행동 자체만으로 바람직한 명령인 정언명령은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하지만

조건이 있는 명령인 가언명령은 인간을 수단화하기 쉽다.

정의는 사회계약을 기초로 해야 하는데 이는 집단적 동의가 용인되는 상상의 계약이다.

그래서 본질적인 도덕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善을 따질 수 있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삶의 목표가 행복이지만 행복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미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며 실천적 지혜를 통해 미덕을 갖추는 존재 방식이라고 한다.

좋은 삶을 사는 것은 바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인간 고유의 언어력과 사고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의 목적은 좋은 시민을 양성하는 것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목적론에 근거를 둔다.

우리가 정의를 선택의 문제로 보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목적이나 선에 얼마나 적합한가의 문제로 본다.

 

4. 우리는 서로에게 어떠한 의무를 갖는가?

조상의 죄를 우리가 사죄해야 하는가?

도덕적 개인주의 입장에서는 남이 아니라 자신이 초래한 의무만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단적 책임의식은 남의 일이다. 개인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독립된 존재라면

어떠한 가치나 도덕과 의무에도 중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각자의 정체성을 정해주는 공동체와 전통이 요구하는 의무가 있다.

이는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자국의 승리를 응원하는 것과 같다.

알래스데어 메킨타이어에 의하면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여서

서사적인 탐색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인간이 체험하는 서사에는 특정한 목적을 지닌다.

통합이나 일관성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회적·역사적 역할과 지위와 관계없는 존재라고 볼 수 없다.

연대의무는 세월을 뛰어넘어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낄 때 생긴다.

소속감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자기 나라의 과거를 현재와 단절시켜놓고

도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각자의 나라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생길 수 없다.

연대의무와 연관된 충직이 보편적 도덕원칙을 거스르는 경우도 있다.

 

5. 정의와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주제

시민의 미덕을 되찾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연대와 상호 책임의식을 키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시민들이 사회의 적극적인 일원이 되어 사회문제를 걱정하고 해결하기 위해

공동선에 헌신하려는 태도, 즉 시민의 미덕을 되찾아야 한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인식하여 시장에 맡기면

타락할 만한 사회적 행위를 시장의 개입에서 보호해야 한다.

그러려면 선의 가치에 맞게 어떠한 규범을 정해야 할지를 공론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위해

바람직한 정책을 찾아내고 관심을 끌어내야 한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시민의 연대의식이 약화될 수 있어 시민의 미덕을 해친다.

시민의 삶에 닿아 있는 제도, 시설을 활성화하여 삶을 개선시켜

공동체 생활에 다수가 참여하게 유도한다.

각자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면서도 도덕적 이견을 무조건 피해가기 보다는

도덕적 추론을 통해 질문을 하고 공개적으로 고민하여

합의를 이끌어 내려는 자세와 행동이 필요하다.

그래야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가 자리 잡게 된다. 

 

-요점-

올바른 가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도덕에서 나온다.

시대별로 그 때의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

그 가치가 한 상황에서는 타당한데 다른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다면

그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를 도덕적으로 추론해 봐야 한다.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은 삶을 고민하게 만드는 철학의 출발이며 도덕적 사고의 밑바탕이 된다.

우선 정의를 이해하는 가치 중에 행복, 자유, 미덕을 시험해본다.

이는 정답 찾기가 아니며 최적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를 점검하고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 칸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만나게 된다.

실생활에서 이슈가 되는 사안마다 무엇이 옳은지를 고민해본다.

다양한 주장으로 한계를 반박하여 한계를 넘어설 견해를 찾아낸다.

그 근거가 되는 원칙을 짚어보면서 다수의 공감을 얻어내는 근본적인 규범을 찾아본다. 

 

-후기-

왜 우리는 정의에 주목하는가?

이제는 경제적 수치보다는 좋은 삶을 고민할 때

 

“한국의 삶의 질, 10단계 추락”

7일 아일랜드의 생활정보잡지 '인터내셔널 리빙'에 따르면

이 잡지가 30년째 매년 진행하는 '삶의 질 지수' 조사에서

한국은 올해 세계 194개국 가운데 42위로,

지난해 32위에서 10계단 하락했다.

(2010.1.7 연합뉴스)

 

왜 사람들은 ‘정의’에 신경쓰기 시작했을까.

사회의 부패와 비리,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팍팍한 삶, 믿지 못할 정치,

흔들리는 법치주의, 빈부의 격차, ‘뻔뻔함’이 정직보다 잘 통하는 상황을 보면서

정말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그러면서 내심 사람들은 “정의‘를 갈망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대학의 목적과 본질을 잘 구현하고 있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라는 강의는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고 있다. (책 속에 강의 요약 DVD가 있다.)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대학이 늘어나고 취업률이 높은 학과가 인기를 끌고,

자신의 이익에 도움 되는 강좌에만 수강생이 몰리는 우리나라 현실에 비해

삶의 방향에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하는 이 강의가

20년간 인기를 끌어오고 있는 것이 부럽기까지 하다.

경제적 성장에만 치중한 우리나라 사회의 발전 방향이

과연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들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 사회는 시장논리에만 치우쳐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삶의 질이 세계 42위라는 통계 수치가 이를 대변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동시에 힘을 합쳐 지하철 전동차를 밀어내던 시민들,

도쿄 전철역에서 선로에 뛰어든 60대 남성을 구한 한국인을 떠올린다.

이들은 내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아래의 글처럼 상황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난다면 이 사회의 정의도 살아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상황에 종속돼 있는 사람이지만

소수가 전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능동적인 행위자다.

그걸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죠." - 최인철 교수(서울대 심리학과)

 

참조;한페이북에서 http://www.1pagebook.org/detail.php?number=1478&thread=12r01r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