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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박범신의소설 - 은교를 향한 두 남자의 열망은 그들 관계를 무너뜨리고 각자를 파멸시켰다.

녹색걷기 2012. 6. 24. 20:29

       

 

1. 이적요 편

은교는 작고 귀여운 새처럼 ‘쫑쫑쫑’ 내게 다가왔다.

은교를 처음 본 것은 어느 초여름 오후였다. 

외출하고 돌아오니 한 소녀가 내 집 앞 의자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얗고 둥근 이마와 짙고 깊은 눈썹 그리고 생기 있는 머릿열망과 번뇌

인간은 종종 이룰 수 없는 이상을 꿈꾸고 그 때문에 번뇌한다.

 

어찌된 일인가. 여기는 호텔 캘리포니아, 

시간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뿐하게 이동한다. 

“따블로 와!” 나는 시간의 얼레를 거꾸로 감기 시작한다. 

내 얼레에 걸린 여자가 예순에서 마흔으로, 마흔에서 서른넷으로 감기다. 

(중략...)“시간은 마음속에 있지. 여긴 호텔 캘리포니아. 더 줄여보지 그러셔?” 

그녀가 키득키득 웃고 “오케이. 여기는 호텔 캘리포니아. 

슬슬 스무 살로 가볼까.” 

내가 소년처럼 신명나게 얼레를 감는다. (중략... 『은교』중에서)

 

위의 글은 『은교』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주인공 이적요 시인이 열일곱 살 은교와 같은 시대에서 같은 나이로 

 

사실 『은교』를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열일곱 소녀에 대한 일흔 살 노인의 열망인가, 

아니면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그들 스스로를 파멸시킨 욕망과 뒤섞인 애증인지... 

참 많이 고민했다. 결국 작가가 내세운 이적요와 

서지우의 일기 속에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변해가는 

점을 붙잡게 되었고,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와 감정의 변화가 

소설의 핵심이라고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감동을 느낀 부분은 바로 이적요 시인의 

일기 속 ‘호텔 캘리포니아’다. 앞서 말했듯이 시인의 갈망과 번뇌 

그리고 이상이 담긴 그 내용이 너무나 서글프면서도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환상이 내게도 있기 때문이다. 

 

- 갈망과 번뇌의 세상 속에서 사는 1인

결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특히 그 애 가슴에 그려진

 ‘창(槍)’ 문양의 문신은 무척 흥미로웠다. 

셔츠 속에서부터 쇄골을 향해 솟아오른 

그 문신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선잠에서 깬 그 애는 내 집과 이어진 동네 뒷산을 오르다가 

우연히 이 집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이끌려 왔다며 

가볍게 인사하고 떠났다. 하지만 얼마 후 내가 청소도우미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왔다. 

나의 일을 돕는 서지우가 데리고 온 것이다. 

서지우는 내가 대학에서 강의할 때 청강하던 학생이었다. 

본래는 무기재료학과 학생이었는데 나의 강의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며 청강을 허락받으러 왔고 

다음 학기까지 강의를 들었다. 

그가 그 해 12월 군에 입대하면서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나서 그가 다시 찾아왔다. 

그 사이 그는 첫 결혼을 실패했고, 하던 일도 그만둔 상태였다. 

내게 찾아온 그는 시를 쓰고 싶다고 했고 

그 날 이후로 나의 문하생이 되어 나를 도우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타고난 성실함과 선한 마음은 인간적으로 높이 평가 할만 했으나 

문학적 재능은 전혀 없었다. 시를 이해하는 감성은 물론 

글재주도 뛰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때로는 답답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 스스로는 문학가로서의 길을 놓지 않고 결국 소설가로 방향을 틀면서 

어리석은 고집을 이어갔다. 

은교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지만, 

청소는 전에 집안일을 봐주던 용안댁 보다 훨씬 깨끗하게 했다. 

그 애는 위 아래층을 작고 귀여운 새처럼 ‘쫑쫑쫑’ 뛰어다니며

 ‘뽀드득뽀드득 화아~’하는 소리를 내며 유리창을 닦았고

 ‘키드득’하고 웃었다. 싱그럽고 파릇한 그 애가 내 집에 들어온 후부터 

내 마음에 밝은 등불이 켜진 것처럼 따듯하고 설렜다.

은교에 대한 나의 낯설고 설렌 감정은 곧 음심을 끌어내고 말았다. 

어느 날 은교가 자신의 창(槍)문양 문신을 내게도 해주겠다며 

나를 눕혀놓고 내 가슴위에 그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애의 머리칼과 가슴이 내 몸에 닿자 나도 모르게 그만 발기하고 말았다. 

늙고 병든 내 몸의 변화는 나를 당혹스럽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일흔이 가까운 내가 고작 열일곱 살 소녀를 갈망하고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세상이 흔히 말하는 변태적인 욕망일 뿐인데 

도대체 어떻게 내 감정을 다스려야 좋을지 몰랐다.

 

2. 서지우 편

은교가 나타나자, 선생님과 나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적요 선생님이 이상해졌다. 

은교를 바라보는 그 이글거리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30년 넘게 시만 써오며 고결한 천재시인의 이미지로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그가 고작 열일곱 살 어린 소녀를 

탐하려는 늙고 추악한 노인의 욕망을 드러내려하는 것 같아 

불안하고 치가 떨린다. 어떻게든 막아야겠다. 

사랑하는 나의 스승님을 위해서, 또 나의 은교를 위해서.

오늘은 베스트셀러가 된 장편소설 『심장』에 관한 TV인터뷰가 있었다. 

며칠 전 나는 선생님께 이 프로에 대한 정보를 흘려놓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작정하고 선생님께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은교를 향한 선생님의 마음은 시궁창처럼 

더럽고 냄새나는 욕망일 뿐이니 이제 그만 접으라고. 

인터뷰프로그램 방송이 끝났을 즈음 선생님 댁에 가보니, 

선생님은 어두운 방에서 잠든 척하고 있었는데 

안색이 안 좋았다. 인터뷰를 본 게 틀림없다.

은교는 선생님 댁으로 가던 어느 날 우연히 

근처 여고 앞에서 처음 만났다. 그날 마사지사인 

은교의 엄마가 다리를 다쳐 그 애는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애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수표 두 장도 함께 주었다. 

그 애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나는 종종 은교를 만나 

맛있는 걸 사주고 용돈도 주었다.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은교를 향한 선생님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본 순간 

내 마음 속에도 은교를 갖고 싶은 마음이 뜨겁게 일어났다. 

피곤하거나 일이 안 풀리는 날이면 은교를 찾아가 

위로를 받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애와 연인처럼 키스도 하고 잠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은교가 이상하다. 나를 피하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은교에게 만나자고 연락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도 꼭 은교가 보고 싶어 나는 학교 앞으로 갔다. 

그런데 그 곳에 이미 스승님의 오래된 코란도가 서 있었다. 

나는 당황하여 건너편으로 가 그 차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곧 은교가 교문 밖으로 나와 여태껏 한 번도 본적 없는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선생님 차에 올라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불안해졌다.

얼마 후 문학관계 행사로 시내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과 내 얘기를 들었는지 은교는 선생님께 

행사 끝나고 오는 길에 자기도 태워달라고 했다. 내가 안 된다고, 

선생님은 다음 일정이 있어서 늦는다고 얘기했지만, 

선생님은 은교에게 그러겠노라 약속해버렸다. 

나는 짜증이 나고 걱정이 됐다. 이러다 저 둘 사이에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 같아 초조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카페 매니저에게 은교의 남자친구인 척 하고 

선생님께 겁을 좀 주라고 부탁한 것이다. 

거칠게 욕을 뱉는 남자의 등장으로 당황한 선생님은 

은교를 만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여태 연락이 안 된다. 

전화기가 꺼져있으니 답답하고 걱정이 된다. 

선생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워 미치겠다. 

 

3. 은교 편

할아버지와 서지우는 내가 아닌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이 지났다. 

오늘은 할아버지의 1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변호사를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를 만나러 가고 있다. 변호사는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도중에 그만 두었다. 모르겠다. 

솔직히 더 이상 나는 할아버지와 관련하여 얽히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인세를 나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바람에 내 이름이 신문에까지 나서 얼마나 쪽팔렸는지 모른다. 

인세고 뭐고 제발 나 좀 빼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책상 정리를 하다 서지우 선생님이 죽기 전 

내게 주었던 디스켓을 발견했다. 자신의 일기라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읽어 보라고 했는데 여태 까먹고 있었다. 

서지우 선생님은 할아버지 보다 6개월 먼저 죽었다. 

그는 할아버지 생신날 술을 잔뜩 먹고 

다음날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나갔다. 

그리고 할아버지 댁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서 추락하였고, 

차가 곧장 폭발해 그 안에서 죽었다. 

서지우 선생님의 디스켓에는 나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자신의 베스트셀러인 『심장』이 사실 할아버지가 쓴 소설이라는 것과, 

그 이후에도 할아버지의 단편소설 몇 개를 훔쳐 

자기 이름으로 문학잡지에 실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단편을 훔친 것은 할아버지도 아셨지만 결국 용서해주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 즈음 할아버지께서 서지우 선생님을 바라보는 

눈빛이 굉장히 차가워졌고 때론 살기까지 느껴졌다고 했다. 

일기를 읽어보니 그는 할아버지가 언젠가는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던 것 같다. 

내 기억에 할아버지는 언제나 온화하고 너그러운 분이셨다. 

내가 서지우 선생님에게 장난을 치다 그에게 혼이 나려 할 때면 

할아버지는 자신의 등 뒤로 나를 숨겨주었다. 

내가 산꼭대기에서 소중한 안나수이 거울을 떨어뜨렸을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건져주셨고 시내로 나가시거나 들어오실 때 

나와 시간을 맞춰 데려오거나 데려다주셨다. 

언젠가 이상한 남자가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던 

할아버지에게  욕을 한 이후에는 한참동안 아무도 안 만나주었지만, 

곧 다시 나를 불러 청소를 시키셨다. 그 즈음 할아버지와 

내가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사주신 노란 블라우스와 

청바지는 여전히 잘 입고 다닌다.

오늘은 할아버지의 변호사를 만나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노트를 읽어보았다. 

그 곳에는 서지우 선생님과 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게 남기신 편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서 선생님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할아버지는 재능이 없다고 여긴 서선생님 대신 글을 써주며 

그가 그토록 원하는 문단에 이름을 올리게 해주셨다. 

그리고 서선생님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모욕하고 자신의 단편을 훔친 것을 알면서도 

미워하거나 증오하기만 하진 못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서선생님을 죽인 자신을 자책하며 

스스로 무덤으로 걸어가지 않았나.

 나에게 그토록 즐거웠던 추억을 만들어주신 두 분이 

나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를 알고 나니 

가슴이 저미는 것 같다. 서선생님과 할아버지가 무척 그립다.

 

-요점-

사람들에게 천재시인으로 칭송받는 이적요 앞에 

천진난만한 소녀 은교가 나타난다. 

이적요는 은교를 만나고부터 자기 내면에 피어오르는 

신선하고 따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제자 서지우 또한 은교를 원한다. 

서지우에게 은교는 동생 같고 연인 같고, 

때로는 잔소리하는 누나 같아 편하고 따듯하다. 

때문에 은교가 나타난 후 늘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제자였던 

서지우와 이적요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서지우는 자신과 은교의 은밀한 관계를 속이고 

이적요의 작품을 훔치는 반면 이적요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만 속으로는 

그를 죽일 결심을 한다. 두 사람은 끝끝내 

서로 진실한 마음을 얘기하지 못하고 파멸한다.

 

-후기-

열망과 번뇌

인간은 종종 이룰 수 없는 이상을 꿈꾸고 그 때문에 번뇌한다.

어찌된 일인가. 여기는 호텔 캘리포니아, 시간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뿐하게 이동한다.

“따블로 와!” 나는 시간의 얼레를 거꾸로 감기 시작한다.

내 얼레에 걸린 여자가 예순에서 마흔으로, 마흔에서 서른넷으로 감기다.

(중략...)“시간은 마음속에 있지. 여긴 호텔 캘리포니아.

더 줄여보지 그러셔?” 그녀가 키득키득 웃고 “오케이.

여기는 호텔 캘리포니아. 슬슬 스무 살로 가볼까.”

내가 소년처럼 신명나게 얼레를 감는다. (중략... 『은교』중에서)

 

위의 글은 『은교』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주인공 이적요 시인이 열일곱 살 은교와 같은 시대에서

같은 나이로 어울릴 수 있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내용이다.

그는 은교와 자신의 나이가 같지 않다는 것 보다 그들이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현실이 무척 슬펐다.

그리고 자신이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미 죽어가는

노인에 불과하여 봄의 새싹처럼 싱그러운 육체를 가진 은교를 사랑하는 것이

노인의 변태적 욕구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한다.

그러한 번뇌가 결국 자신이 열일곱 살 소년이 되고

은교가 일흔의 노인이 되어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호텔 캘리포니아를 꿈꾸게 된 것이다.

 

사실 『은교』를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열일곱 소녀에 대한 일흔 살 노인의 열망인가,

아니면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그들 스스로를 파멸시킨 욕망과 뒤섞인 애증인지... 참 많이 고민했다.

결국 작가가 내세운 이적요와 서지우의 일기 속에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변해가는 점을 붙잡게 되었고,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와 감정의 변화가 소설의 핵심이라고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감동을 느낀 부분은 바로 이적요 시인의 일기 속

‘호텔 캘리포니아’다. 앞서 말했듯이 시인의 갈망과 번뇌 그리고 이상이 담긴

그 내용이 너무나 서글프면서도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환상이 내게도 있기 때문이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는 사실 최근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저 탐욕스런 노인과 어리지만 성적매력이 있는

여자아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야한 이야기일 것이라고만 예상했다.

물론 아직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읽은 소설 『은교』는 그렇지 않았다.

책 내용에는 은교를 바라보는 시인 이적요의 순수하고 열렬한

마음을 비추는 훌륭한 시들이 있어 더욱 감동적이었으며

단순히 육감적인 어린 여자아이가 아닌 순수하고 깊은 감성을 가진

은교는 작고 연약한 토끼 같은 매력이 있었다.

충분히 흥미롭고 서정적인 소설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