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이 친구인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허백정(虛白亭)이란 정자에 대해 써준 글이다. 홍귀달의 자가 겸선(兼善)이고, 호는 허백정(虛白亭) 또는 함허정(涵虛亭)이다. 경숙(磬叔)은 성현의 자이다. 두 사람이 모두 허백을 당호(堂號)로 썼으니, 허백의 뜻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만하다. 이 글은 대부분이 문답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허백(虛白)은 《장자(莊子)》에서 온 말로 마음을 텅 비우고 무위(無爲)의 삶을 살겠다는 뜻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 말을, 주자(朱子)가 《대학(大學)》에서 명덕(明德)을 마음의 밝은 본체로 보고 “허령하여 어둡지 않아서 모든 이치를 다 갖추고서 만사에 응한다.”고 정의한 것과 같은 뜻으로 보고, 나아가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 내지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와 《중용(中庸)》의 화육(化育)에까지 연결한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 홍귀달이 병조참판으로 벼슬길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고, 또한 퇴계(退溪)에 의해 주자학(朱子學)이 토착화되기 이전에는 이와 같이 선비들이 노장(老莊)과 유가(儒家)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지 않고 은일(隱逸)한 삶을 즐기는 경향이 많았다.
조선 성종(成宗) 때 한양의 남산에 허백당이란 999칸이나 되는 거대한 집이 있다는 풍문이 팔도에 퍼졌다. 민가는 100칸을 넘을 수 없는 법이거늘 999칸이라니. 상경하는 서생들은 그 집을 찾아 남산을 헤매다가 마침내 단칸의 허름한 초옥(草屋)인 허백정을 보고는 큰 감명을 받고 갔는데, 허백정 주인 홍귀달이 이 집에 누우면 999칸의 사색을 하고도 공간이 남는다고 했던 말 때문에 생겨난 소문이었다고 한다.
허백정은 사방이 겨우 두어 장(丈)에 불과한, 혼자 거처하기에도 좁은 단칸집이었다 한다. 그 곳에서 홍귀달은 “빗소리 솔바람조차도 시끄러운 게 싫어라.[山雨松風亦厭喧]”라는 시구를 읊으며 무욕(無慾)의 고요한 삼매(三昧) 속에 노닐었다. 그는 높은 벼슬아치로 있을 때에도 퇴근하면 수수한 선비 차림으로 허백정에 들어가서 세상 속에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때로 벗들이 찾아오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으니, 참으로 청한(淸閑)한 유선(儒仙)의 삶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장자(莊子)는 또 “마음이 바르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텅 비고 텅 비면 의식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다.”8) 하였고, 송(宋)나라 주렴계(周濂溪)는 ‘욕심이 없으면 마음이 고요할 때 텅 비니, 고요한 상태에서 텅 비면 밝아지고, 밝으면 통한다.’9) 하였으며, 주자(朱子)도 “마음이 전일(專一)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절로 마음을 덮어 가리는 어리석음이 없게 된다.”10) 하였다. 불교의 선정(禪定)이 마음을 비우는 공부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마음은 곧잘 거울로 비유된다. 거울이 먼지로 더럽혀지면 대상이 흐릿하거나 굴절되어 비치듯, 마음도 텅 비어 있지 않으면 대상을 분명히 비출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양학에서는 마음 비우는 공부를 특히 중시하여, 유가(儒家)의 경(敬)이건 불교의 참선이건 대개 마음만 비우면 공부는 절로 성취된다고 보았다. 또한 이른 아침, 작은 창에 비쳐드는 고요한 햇빛처럼 텅 비고 환한 마음, 이것을 곧 밝은 지혜요 참된 행복이라 여겼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워 익힐 수 있는 본연의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다. 그런데 이율배반(二律背反)처럼 우리가 무엇을 배워 익혀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 마음과 몸도 점점 속박되어 간다. 그리하여, 마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자꾸만 술과 담배를 찾듯이 나의 행동과 말과 생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자꾸 익숙해 편한 길로만 가려 한다. 익숙해 편한 길로만 가려 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이요, 업 속에 살면서 업의 구속을 벗어나 실상을 보는 것은 마음의 밝음, 곧 지혜이다. 업의 구속을 벗어나려면 허백정 주인처럼 오직 마음을 비워야 하니, 마음을 텅 비우지 않으면 길상(吉祥)한 빛이 나의 내면에 모여들 수 없다.
'지혜와 처세훈.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이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괴테) (0) | 2012.01.29 |
---|---|
대인(大人)과 소인(小人) (0) | 2012.01.28 |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 (0) | 2012.01.27 |
문득 나를 보다 (0) | 2012.01.26 |
고전명구 속에 선인들의 삶의 자세 .... (0) | 2012.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