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걷기

한시 한소절 읽기

녹색걷기 2009. 5. 3.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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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空山春雨圖                       빈 산에 봄비 내려    

            戴熙(淸)                                              대희(청)

              空山足春雨                                    빈 산에 봄비 넉넉하더니

              緋桃間丹杏                                    복사꽃 살구꽃 사이사이 울긋불긋

              花發不逢人                                    꽃은 피었건만 보는 이 하나 없어   

              自照溪中影                                    가만히 제 그림자 시냇물에 비추고 있네

 

海印寺를 품고 있는 산이 伽倻山이고, 해인사에 이르는 계곡이 紅流洞입니다. 시오리 홍류동 계곡은 百潭寺로 거슬러오르는 설악산의 百潭溪谷, 佛影寺를 안고 흐르는 울진의 佛影溪谷, 무주의 구천동계곡 등과 더불어 남한의 가장 길고 아름다운 계곡의 하나로 꼽힙니다. ‘紅流洞’이라는 이름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붉음이 흐르는 골짜기’쯤 될 듯합니다. 봄에는 계곡 양쪽에 피어난 진달래, 철쭉의 그림자가 가득 비쳐 흐르는 물이 붉고, 가을에는 붉은 단풍잎이 수면을 뒤덮어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홍류동 골짜기 한 구비에 籠山亭이란 한 칸짜리 작은 정자가 하나 서 있고, 계곡 건너 그 맞은편에는 題詩石이라 불리는 바위가 직립해 있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이 바위에 유명한 시 한 수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농산정’이라는 정자 이름도 이 시의 끝 구절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미친 듯 겹친 돌 때리어 첩첩한 산 울리니   狂奔疊石吼重巒

  지척간의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人語難分咫尺間

  세상의 시비 소리 들릴까 저어하여          常恐是非聲到耳

  흐르는 물더러 온 산을 감싸게 하였으리     故敎流水盡籠山
 
崔致遠 선생의 <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작품입니다. 시도 시려니와 매우 힘차고 속도감 있는 필치의 行草書로 써내려간 글씨 또한 누구의 솜씨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거칠 것 없이 활달하여 눈을 시원하게 합니다.

지금부터 꼭 서른 해 전부터 몇 년 동안 해인사에 산 적이 있습니다. 그때 틈이 나면 한 차례씩 제시석과 농산정으로 발걸음을 하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빈 손으로 걸어내려가 한 바퀴 정자와 바위를 보고 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종이와 먹방망이를 비롯한 자잘한 도구를 챙겨 하루종일 榻本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제 가야산 자락의 옛 절터에 새 절을 지어 살고 있는 스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해인사 시절을 함께 보낸 분입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하는 말이 “한번 넘어 오이소.”였습니다. 불현듯 홍류동계곡과 제시석과 농산정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쯤 홍류동계곡에는 진달래가 점점이 피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추고 있을 듯합니다. 보는 이 있건 없건 시냇물에 비친 제 모습을 물끄러미 굽어보고 있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