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걷기

나는 걷는다~

녹색걷기 2012. 12. 29. 16:05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이 있다. 눕는다는 것은 정체와 피로, 병과 죽음을 상징한다. 걷는다는 것은 변화와 활력, 건강과 생명을 상징한다. 묘하게도 인간의 기술문명은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발달을 촉진시켜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켜왔다. 먼 거리를 오랫동안 걷지 않고도 비행기 등을 타고서 단숨에 횡단하거나 사무실이나 집에 앉아서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도구와 기술은 진화했지만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걷는 문화에서 타거나 앉는 것에 의존하는 문화로 '퇴화'한 것은 아닐까.

 

"걷는다는 것은 자유며 교류다. 그런데 철과 소음의 감옥인 자동차는 선택이 불가능한 혼잡스러운 장소인 것이다. 이 유목민의 후손들이-게다가 조상의 덕망을 즐겨 칭송하는 사람들이- 자동차 안에서 앉은뱅이가 되어 이제 근육을 써서 스스로 움직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활동성이 퇴화해버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1만2000킬로미터를 오직 두 발로 완보한 저자는 걷는 자유인에서 탈 것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류의 운명을 이렇게 토해내고 있다. 저자가 30년 동안 프랑스에서 정치 경제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수없이 비행기를 타고가면서 내려다보았을 실크로드의 먼 여정을 걷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저자의 인생 이력은 독특하다. 그는 프랑스 바스노르망디 주 망슈에서 화강암 채굴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토목 인부, 부두 노동자, 식당종업원, 외판원 등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거의 서른이 되어서야 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프랑스 기자협회의 공인을 받은 저널리즘 그랑제콜인 CFJ를 졸업했다. 이후 '파리 마치' '르피가로' 등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은퇴했다.

 

직장도 은퇴하고 부인을 먼저 떠난 뒤 홀로 남아 고독을 삼키던 저자는 소파와 침대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달리기와 걷기로 신체를 단련한 후 파리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2325킬로미터를 도보로 여행했다. 저자는 이 도보여행을 통해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비행청소년들을 치유하는 목적으로 '쇠이유'(Seuil)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청소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방법은 바로 '걷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비행청소년들의 재범률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저자는 마침내 1999년 봄 마치 마르코 폴로처럼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대장정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 책은 바로 그 대장정의 기록이다. 사진 한 장 없는 세 권의 저작물인데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자신의 주관적인 상념을 최대한 자제하고 여행에서 일어난 온갖 일들을 기자 출신답게 객관적으로 기술했다. 분쟁 지역을 통과하면서 억류되기도 하고 사나운 목양견인 캉갈을 만나 위험한 고비도 넘기지만 과장이나 허풍 없이 속도감 있게 여행을 그려내고 있다. 저자가 책 끝 무렵에 남긴 말이 여운을 남긴다.

 

"나 이전에 걸어서 실크로드 전체를 다녀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르코 폴로 이래로···. 그러나 무용담이나 위업을 추구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내 지난 인생을 천천히 반추해볼 생각이다. 무척 오래전부터 나는 자아를 탐구해왔는데 이 여행이 나에게 보여준 것은? 나는 내가 변한 것이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불현 듯 영원의 개념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든다."